제2차 발칸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차 발칸 전쟁은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 이후 발칸 동맹의 영토 분할 갈등으로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대부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계획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몬테네그로의 연합군에 맞서 패배하였고, 부쿠레슈티 조약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영토를 상실했다.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로 부상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2차 발칸 전쟁 - 부쿠레슈티 조약 (1913년)
부쿠레슈티 조약 (1913년)은 제2차 발칸 전쟁의 종결을 위해 체결되었으며, 불가리아는 영토를 잃고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하며 발칸 반도 국가 간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제2차 발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제2차 발칸 전쟁 |
일부 | 발칸 전쟁 |
![]() | |
장소 | 발칸반도 |
날짜 | 1913년 6월 29일 - 8월 10일 |
결과 | 불가리아 왕국의 패배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 체결 불가리아 왕국 영토 일부 상실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불가리아 왕국 |
교전국 2 |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오스만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페르디난드 1세 미하일 사포프 스테판 토셰프 니콜라 제코프 |
지휘관 2 | 페타르 1세 라도미르 푸트니크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페타르 보요비치 카롤 1세 페르디난드 왕세자 이온 쿨체르 콘스탄티노스 1세 니콜라 1세 다닐로 왕세자 얀코 부코티치 메흐메트 5세 엔베르 파샤 아흐메트 이젯 파샤 |
병력 | |
병력 1 | 600,000+ |
병력 2 | 348,000 330,000 148,000 12,800 255,000 총합: 1,093,802 |
사상자 | |
사상자 1 | : 전사: 7,583명 실종: 9,694명 부상: 42,911명 사망: 3,049명 포획 또는 파괴된 대포: 140문 총합: 사망 또는 부상 65,927명 |
사상자 2 | : 50,000명 전사: 9,000명 부상: 36,000명 질병 사망: 5,000명 : 1,600명 전투 중 사상자 미미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사망 1,600명 : 29,886명 전사: 5,851명 부상: 23,847명 실종: 188명 : 1,201명 전사: 240명 부상: 961명 : 4,000+명 전투 중 사상자 미미 질병 사망: 4,000명 총합: 전투 중 사상자 약 76,000명 총 손실 약 91,000명 |
영토 변화 | |
불가리아 양도 지역 | 동트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에 양도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 왕국에 양도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세르비아 왕국에 양도 서부 트라키아 일부를 그리스 왕국에 양도 |
2. 배경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발칸 동맹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영토 분할 문제를 놓고 갈등이 발생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견제로 아드리아해 진출이 좌절되자 마케도니아에서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며 불가리아와 대립했다. 1912년 3월 13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크리바팔랑카–오흐리드 선 북쪽 지역은 러시아의 중재를 받는 "분쟁 지역"으로, 이 선 남쪽 지역은 불가리아에 할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 중 세르비아는 합의된 국경선보다 남쪽인 비톨라–게브겔리아 선까지 영토를 확보했고, 불가리아는 이를 전쟁 전 합의 위반으로 간주했다.
그리스 역시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고 세르비아와 공동 국경을 형성하며 불가리아와 갈등을 빚었다. 1913년 5월 19일,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위협에 맞서 비밀 방위 동맹을 체결했다.[11]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도 실리스트라 요새 할양 문제를 놓고 갈등했다. 러시아의 중재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의정서가 체결되어 불가리아는 실리스트라를 포기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중재에 대한 불가리아의 불신을 초래했다.[12] 결국 러시아는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2. 1. 불가리아의 전쟁 계획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신속하게 격파하고 최대한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불가리아군 전체가 투입되었으며, 바르다르 강 평야를 따라 세르비아군에 대한 집중 공격을 통해 북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그리스군에 대해서는 테살로니키와 남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17]불가리아 군부는 그리스군을 격파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부족했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남부 전선을 방어하고 북부에서 세르비아군을 격파한 후 증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17]
그러나 루마니아의 개입이나 오스만 제국의 반격에 대한 대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공격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었는데,[17] 1912년 12월 러시아가 카롤 1세를 명예 러시아 원수로 임명하고,[11] 6월 9일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17] 이러한 가정을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3. 전쟁 과정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지방 전체를 차지할 목적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불가리아 왕국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그리스 왕국, 루마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루마니아 왕국, 오스만 제국, 몬테네그로 왕국도 세르비아와 그리스 동맹에 가담하여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63]
불가리아 왕국군은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등을 맹폭하며 맞섰으나, 외교 및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 사이 오스만 제국은 동트라키아 지역을 회복했다. 결국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발칸 국가들과 전쟁을 치르게 된 불가리아 왕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불가리아군은 1903년 육군법에 따라 '현역군'과 민병대로 나뉘었고, 주력은 9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이었다. 불가리아군은 유럽의 다른 군대와는 다른 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1개 보병사단은 3개 여단, 1개 여단은 2개 연대, 1개 연대는 4개 대대, 1개 대대는 6개 중대, 1개 중대는 250명으로 구성되었다. (250명은 일반적인 중대보다 큰 규모였다.) 여기에 1개 독립대대, 2개 중(重)포병연대, 1개 기병연대가 더해져, 총 1개 사단이 25개 보병대대(일반적인 대대보다 병력이 훨씬 많았다)와 16개 기병중대로 구성되었다.[64][65] 당시 군대에서 일반적인 9개 대대 × 2개 사단보다 병력이 많았다. 제1차 발칸 전쟁 발발 시점에 동원된 불가리아군의 병력은 599,878명이었지만, 사단 수는 9개에 불과했고, 불가리아군의 '사단'은 군단에 가까운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군은 9개 사단이었지만 118,000명에 불과했다. 그리스군 9개 사단은 대포 176문, 세르비아군 10개 사단은 대포 230문을 보유했지만, 불가리아군은 1,116문을 보유하여 그리스군의 6배, 세르비아군의 5배에 달했다.
제2차 발칸 전쟁 중 불가리아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제1차 발칸 전쟁 발발 시점에 불가리아군은 599,878명을 동원했다. 전쟁 중 33,000명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점령지에서 6만 명을 징병하여 보충했다. 불가리아군 수뇌부에 따르면, 6월 16일 시점에는 병사 492,528명과 장교 7,693명이 편성되어 있었다.[66] 그러나 부상자를 포함한 손실을 빼고 신병을 더하면 최소 576,878명이 된다.
불가리아군의 배치는 바실 쿠틴체프가 이끄는 제1군과 라트코 디미트리예프가 이끄는 제3군이 구 세르비아-불가리아 국경에, 스테판 토셰프가 이끄는 제5군이 퀴스텐딜 일대에, 스틸리안 코바체프가 이끄는 제4군이 코차니와 라도비슈 지역에 배치되었고, 니콜라 이바노프가 이끄는 제2군이 대(對) 그리스군에 배치되었다.
세르비아 왕국군은 348,000명이었고, 그중 252,000명이 전투원이었다. 3개 군 10개 사단으로 나뉘었으며, 주력은 바르다르 강 연안과 스코페 근처에 배치되었다. 명목상의 총사령관은 페타르 1세였고, 라도미르 푸트니크가 참모총장과 실질적인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리스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가 군의 지휘를 맡았고, 두스마니스 중장이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몬테네그로는 마케도니아 전선에 얀코 부코티치 장군이 이끄는 1개 사단(1만 2천 명)을 파병했다.
루마니아 왕국은 1878년 루마니아 독립전쟁 이후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평시에는 장교 6,149명과 병사 94,170명을 보유하고 있었고, 루마니아군은 주로 크루프사가 제조한 야포 126문, 곡사포 15문, 산포 3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원 시에는 5개 군으로 나뉘는 417,720명을 소집할 수 있었으며, 그중 약 8만 명이 남도브루자 점령을 목표로 하고, 25만 명이 불가리아에 대한 공세를 목표로 했다.
3. 1. 세르비아 전선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왕국을 상대로 마케도니아 지역 전체를 차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불가리아군은 주력 부대인 제1군, 제3군, 제4군, 제5군을 투입하여 세르비아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는 제4군과 제2군만이 공격 명령을 받아, 세르비아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불가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불가리아 제4군은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공격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29] 1913년 6월 29일/30일, 브레갈니차 전투가 발발하여 불가리아 제4군과 세르비아 제1, 제3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즐레토브스카 강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이후 불가리아군이 후퇴하면서 브레갈니차 강 유역으로 전선이 이동했다.[29] 7월 1일부터 3일까지 불가리아군은 내부 혼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29] 세르비아군은 전투 없이 불가리아 제4군의 제7사단 전체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29] 7월 8일에는 불가리아군의 패배가 뚜렷해졌다.[30]
한편, 북쪽에서는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 국경 도시 피로트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세르비아군 사령부는 피로트와 니시를 방어하기 위해 제2군에 증원군을 파견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리아군이 7월 18일 칼리만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서의 세르비아군 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1913년 7월 13일, 미하일 사보프 장군이 불가리아 제4군과 제5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31] 불가리아군은 마케도니아 북동부 브레갈니차 강 유역의 칼리만치 마을 주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31] 7월 18일, 세르비아 제3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불가리아군 진지를 압박했지만,[31] 불가리아군은 굳건히 저항하며 포병대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31] 만약 세르비아군이 불가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면, 불가리아 제2군이 궤멸되고 불가리아군이 마케도니아에서 완전히 밀려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31] 그러나 불가리아군의 방어 성공과 북쪽에서 제1군, 제3군의 승리는 서부 불가리아를 세르비아군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32] 비록 불가리아군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남쪽에서는 그리스군의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32]
전투 | 날짜 | 지휘관 | 지휘관 | 결과 |
---|---|---|---|---|
브레갈니차 전투 | 1913년 6월 30일~7월 9일 | 미하일 사보프 | 라도미르 푸트니크 | 세르비아 승리 |
크냐제바츠 전투 | 1913년 7월 4일~7일 | 바실 쿠틴체프 | 부코만 아라치치 | 불가리아 승리 |
피로트 전투 | 1913년 7월 6일~8일 | 미하일 사보프 | 보지다르 얀코비치 | 세르비아 승리 |
벨로그라드치크 전투 | 1913년 7월 8일 | 미하일 사보프 | 보지다르 얀코비치 | 세르비아 승리 |
비딘 공성전 | 1913년 7월 12일~18일 | 크라스튜 마리노프 | 부코만 아라치치 | 평화 조약 |
칼리만치 전투 | 1913년 7월 18일~19일 | 미하일 사보프 | 보지다르 얀코비치 | 불가리아 승리 |
3. 2. 그리스 전선
불가리아는 제1, 3, 4, 5군을 동원해 세르비아군을 공격하고, 제2군으로 테살로니키의 그리스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개전 직후 제2군과 제4군만 진격 명령을 받았다.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진격을 저지했다. 그리스 전선에서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불가리아군이 초기에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6월 19일 그리스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자 테살로니키 북쪽 진지에서 철수해야 했다. 테살로니키에 배치된 불가리아 대대는 고립되어 섬멸되었다. 이후 불가리아군은 킬키스와 스트루마 강 사이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마케도니아 중부에서 세르비아군을 격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불가리아군은 루마니아가 개입하기 전에 철수를 시작했다. 그리스군의 진격으로 인해 불가리아군은 수도 소피아를 방어하기 위해 후퇴해야 했다.
니콜라 이바노프 장군이 지휘하는 남마케도니아의 불가리아 제2군은 도이란 호에서 남동쪽으로 킬키스, 라하나스, 세레스, 팡가이온 산맥을 넘어 에게 해까지 이어지는 지역에 배치되었다. 제2군은 5월부터 이 지역에 주둔했으며, 제1차 발칸 전쟁 당시 에디르네 포위전을 치른 경험 많은 부대였다. 이바노프 장군은 패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가 36,000명에 불과하고 많은 부대가 인원 부족이라고 주장했지만, 제2군의 부대 구성을 자세히 분석하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제2군은 제3사단에서 1개 여단을 제외한 병력(4개 연대, 총 16개 대대와 사단 포병), 제1, 제10여단의 제16, 25연대(총 8개 대대와 포병), 드라마 여단의 제7, 69, 75연대(총 12개 대대), 세레스 여단의 제55, 56, 57연대(총 12개 대대와 사단 포병), 제5국경대대, 제10독립대대, 제10기병연대(7개 승마 중대와 7개 보병 중대)로 구성되었다. 총 58개 보병 대대, 232개 중대, 1개 기병 연대(14개 중대), 175문의 대포를 보유한 병력은 8만 명(불가리아 측 공식 수치)에서 10만 8천 명(그리스 측 공식 문헌, 1932년 이전 공식 불가리아 전쟁사에 근거)이었다.[67] 현대 역사가들은 이바노프가 병력 수를 과소평가했지만, 그리스군보다는 병력이 적었다는 데 동의한다.[49] 그리스 참모본부 역시 불가리아군 병력을 8만 명에서 10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68]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은 8개 사단과 1개 기병여단(117,861명), 176문의 대포를 보유하고,[69] 오르파노스 만에서 게브겔리야 지역까지 배치되었다. 그리스군 참모본부는 불가리아군의 공격 목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리아군은 공격 지점에서 일시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6월 26일, 불가리아군은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테살로니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불가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29일 전면 반격 명령이 내려졌다. 불가리아군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노획한 대포를 사용하여 킬키스에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스 제4, 제2, 제5 여단은 대포 지원을 받으며 평야를 진격하여 불가리아군을 기습,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음 날 참호를 점령했다. 불가리아군 좌익에서는 제7사단이 세레스를, 제1과 제6사단이 라하나스를 점령했다. 그리스군은 제2군을 격파했는데, 이는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의 최대 패배였다. 불가리아 측 문헌에 따르면 6,971명의 사상자, 6,000명 이상의 포로, 130문 이상의 대포가 그리스군에 노획되었지만, 그리스군의 사상자는 8,700명으로 추산되었다.[70] 28일, 불가리아군과 비정규군은 후퇴 과정에서 세레스(북서쪽은 불가리아 영토, 남동쪽은 그리스 영토)에 방화했다.[71] 그 밖에도 니그리타, 독사토, 시디로카스트로가 방화되었지만,[72] 전투 후 그리스군이 킬키스와 주변 불가리아인 마을에 방화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졌다.[73] 불가리아군 우익에서는 그리스군의 에프조네스가 게브게리야와 마치코보 고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군의 도이란을 통과하는 후퇴 경로가 위협받자, 이바노프의 군대는 궤멸에 가까운 필사적인 후퇴를 감행했다. 제14사단이 증원되었지만 이미 늦었고, 스트루미차와 불가리아 국경으로 후퇴에 합류했다. 그리스는 7월 5일에 도이란을 점령했지만, 불가리아군의 스트루마 산길을 통한 후퇴는 저지하지 못했다. 11일, 그리스 육군은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카발라에서 상륙하여 서트라키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19일, 그리스군은 네브로코프를 점령했고, 25일 해군과 육군의 연합 공격으로 알렉산드루폴리스를 점령, 불가리아를 에게 해에서 완전히 고립시켰다.[74]
세르비아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맞서던 불가리아군이 격파된 것을 확인하고 불가리아 영토 깊숙이 진군하여 수도 소피아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세르비아군이 전쟁 목표를 달성하여 전투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남은 전투의 부담을 그리스군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것을 알고 국왕의 결정에 반대했지만 결국 설득되었다. 크레스나 협곡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세르비아 전선에서 온 불가리아 제2군과 제4군의 기습을 받아 방어 진지를 구축했으나, 7월 21일 그리스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불가리아군이 반격했다. 불가리아군 참모본부는 칸나이 전투처럼 그리스군을 포위하려 양익에 압력을 가했다.[78] 그러나 격전 끝에 그리스군은 크레스나 협곡을 돌파하여 7월 26일 시미트리를 점령했고,[79] 27일부터 28일 밤에는 불가리아군이 소피아에서 76km 남쪽 고르나 주마야까지 밀려났다.[80] 한편, 그리스군은 서트라키아로 진군을 계속하여 7월 26일 크산티에, 다음 날 코모티니에 입성했다.[80] 28일, 불가리아군은 그리스군에게 밀려 고르나 주마야를 포기해야 했다.[81]
그리스군은 피로와 보급 문제에 직면했지만, 굳건히 저항하며 국지적인 반격도 가했다. 7월 20일, 불가리아군은 그리스군의 양익에서의 반격을 격퇴해야 했기에 공격을 늦추었다. 동쪽에서는 그리스군이 프레델라 산길을 통해 메호미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불가리아군에 의해 산길 동쪽에서 저지되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서쪽에서는 세르비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차레보 셀로로 공세를 시작했지만, 결국 그리스군이 진지를 유지했다.[82]
전투 | 날짜 | 지휘관 | 지휘관 | 결과 |
---|---|---|---|---|
칼리노보 전투 | 1913년 6월 19일-21일 | 콘스탄틴 카바르날리예프 | 콘스탄티노스 1세 | 불가리아 승리 |
킬키스-라하나스 전투 | 1913년 6월 19일-21일 | 니콜라 이바노프 | 콘스탄티노스 1세 | 그리스 승리 |
도이란 전투 | 1913년 6월 23일 | 니콜라 이바노프 | 콘스탄티노스 1세 | 그리스 승리 |
데미르히사르 전투 | 1913년 6월 26일-27일 | 니콜라 이바노프 | 콘스탄티노스 1세 | 그리스 승리 |
크레스나 협곡 전투 | 1913년 7월 27일-31일 | 미하일 사보프 | 콘스탄티노스 1세 | 교착 상태 |
3. 3. 루마니아의 개입
루마니아 왕국은 1913년 7월 5일 남도브루자를 탈취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7월 10일에 불가리아 왕국에 선전포고했다.[49] 루마니아 정부는 선전포고의 목적과 전쟁으로 인한 유혈 사태에 대한 국제적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루마니아는 불가리아의 국가 조직을 항복시키려 하거나, 그 군대를 격파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외교 공문을 발송했다.[49]루마니아가 선전포고한 날, 이온 크르체스크 장군이 이끄는 루마니아 제5군(8만 명)이 도브루자에 침공하여 투르투카이에서 발칙까지를 전선으로 점령했다.[49] 제5군의 기병은 불가리아의 저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바르나 시를 점령했다.[49] 7월 14일부터 15일까지 밤에, 페르디난드 왕자가 이끄는 도나우 군이 올랴호보, Gigen영어, 니코폴에서 불가리아 국경을 넘었다.[49]
최초 점령이 완료되자 루마니아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서쪽의 페르디난드(현 몬타나)로 진격하고, 다른 한 부대는 남서쪽에 있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로 향했다. 두 부대 모두 본군이 공격하기 전에 기병 부대를 정찰에 파견했다.[54] 7월 18일, 루마니아군은 페르디난드를 점령하고, 20일에는 소피아에서 북쪽으로 116km 떨어진 블라차를 점령했다. 7월 23일, 루마니아군 선봉 기병이 소피아에서 불과 약 11.27km 떨어진 블라지데브나에 입성했다.[54] 25일에는 루마니아군과 세르비아 왕국군이 베로그라드치크에서 합류함으로써 중요 도시 비딘이 고립되었다. 불가리아의 후방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고, 루마니아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수도 소피아로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54]
루마니아 공군은 사진 정찰을 실시하고 선전용 소책자를 공중 투하했다. 그 때문에 소피아는 처음으로 적국의 비행기에 상공을 침범당한 수도가 되었다.[54] 루마니아군은 단기간의 참전에서 전투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콜레라가 만연하여 6천 명을 잃었다.[54]
리처드 홀에 따르면, "루마니아가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불가리아의 상황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루마니아가 도나우 강을 건넌 것은 제2차 발칸 전쟁의 결정적인 군사 행동이 되었다"고 한다.[83]
3. 4. 오스만 제국의 개입
루마니아의 침공에 저항이 없자,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 왕국에 할양되었던 영토를 침공했다. 침공의 주요 목표는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벨체프가 이끄는 4천 명의 병력만이 에디르네를 지키고 있었다.[55] 동트라키아를 점령하고 있던 대부분의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군과 그리스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 시기에 철수한 상태였다. 7월 12일, 차탈자와 갈리폴리에 주둔하던 오스만군은 에노스-메데아 선에 도달했고, 20일에는 이 선을 넘어 불가리아를 침공했다.[55] 아흐메트 이제트 파샤가 이끄는 20만에서 25만 명의 오스만군은 제1군을 선두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2군, 제3군, 제4군 순으로 배치되었으며, 제4군은 갈리폴리에 배치되었다.[55]수적으로 압도적인 오스만군의 진격에 불가리아군은 발칸 전쟁 이전의 국경선으로 후퇴했다. 에디르네는 7월 19일에 포기되었으나, 오스만군이 즉시 점령하지 않아 다음 날인 20일에 불가리아군이 재점령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의 진격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21일에 다시 포기되었고, 23일에 오스만군이 점령했다.[55] 에디르네는 1360년대에 무라트 1세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전쟁장관 엔베르 파샤는 자신을 "두 번째 에디르네 정복자"라고 칭하며 권위를 과시했지만, 에디르네 공격은 사실상 저항을 받지 않았다.[55]
오스만군은 발칸 전쟁 이전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고 불가리아 영토로 진입했다. 기병대는 얀볼로 진격했다.[55]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루마니아의 진군보다 오스만 제국의 진군에 대한 공포가 더 컸으며, 많은 이들이 산악 지대로 피신했다. 불가리아 지도부조차도 운이 다했음을 인정했다. 역사가 리처드 홀(Richard C. Hall)은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불가리아 병사들이 죽은 동트라키아 전장이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고 말했다.[55] 루마니아군과 마찬가지로 오스만군도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지만, 콜레라로 4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55] 오스만군은 침공 중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동트라키아 불가리아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고, 거의 전부 추방되었다. 이는 1918년에 출판된 1913년 트라키아 불가리아인의 파멸에 기록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트라키아에서의 빠른 진격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는 코카서스를 넘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고, 흑해 함대를 콘스탄티노플로 파병했지만, 이는 영국의 개입을 초래했다.
전투 | 연도 | 지휘관 | 지휘관 | 결과 |
---|---|---|---|---|
아드리아노플 포위전 | 1913 | 미하일 사보프 | 엔베르 파샤 | 제1정전협정 |
오스만 제국의 트라키아 진격 | 1913 | 뷜코 벨체프 | 아흐메드 이제트 파샤 | 최종 정전협정 |
4. 결과 및 영향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크게 원망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다.[84] 이 전쟁의 패전은 불가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서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제2차 발칸 전쟁 결과, 세르비아는 도나우강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로 성장했으며,[88] 바르다르 중부와 노비파자르 동쪽 절반을 얻었다. 이는 프랑스 차관을 통한 군사 투자 덕분이었다. 세르비아 영토는 약 48303.04km2에서 약 87776.85km2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50만 명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영토 주민들은 전후 탄압과 괴롭힘을 당했다. 예를 들어, "문화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거부당했는데, 실제로는 세르비아인 이외 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드니치케 노비네(Радничке новине) 등 야당 계열 신문은 "새로운 세르비아인들"이 터키 지배하에서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고 지적했다.[89] 터키식 건물, 학교, 목욕탕, 모스크가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 영국 부영사는 체계적인 협박,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 등이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합병 지역에서 자행되었다고 보고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조사하거나 막는 데 관심이 없었고, 공정하게 선발된 여러 국가 전문가들로 구성된 카네기 조사단이 발칸 반도에 도착했을 때 베오그라드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90]
강화 조약에 따라 그리스군은 전쟁 중 점령했던 서트라키아와 피린 마케도니아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불가리아에 할양된 지역과 알바니아에 할양된 북에피로스는 그리스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스는 전쟁 중 점령했던 지역 중 독일의 외교적 지원으로 세레스와 카발라만을 확보했다. 세르비아는 북마케도니아에서 더 많은 영토를 얻고 남부 영토 확장에 만족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눈을 돌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갈등을 빚었고, 1년 후 전쟁이 발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에서 리비아를 둘러싼 싸움 중 에게해의 도데카니사 제도를 점령했지만, 발칸 전쟁을 구실로 1912년 협정을 위반하여 반환하지 않았다.
런던 조약에 따라 알바니아는 독립했지만, 아드리아해의 오트란토 해협을 지배하려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가 강력하게 주장한 결과였다. 1913년 12월 17일 피렌체 협정에서 알바니아 국경이 결정되면서 세르비아는 아드리아해로의 출구를 잃었고, 그리스는 알바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북에피로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현지 그리스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결정이었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1914년 코르푸 협정에서 북에피로스 자치 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치권을 얻었다.[91]
패배한 불가리아는 보복주의에 빠져 민족주의적 야망을 채울 기회를 엿봤다.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 후, 불가리아 대표단 단장 톤체프는 "열강이 (영토 분할을) 바꾸거나, 우리 자신이 그것을 깨뜨릴 것"이라고 말했다.[88] 그 결과, 불가리아는 발칸 지역 적국(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루마니아)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편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앙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다시 패배하여 국가적 트라우마를 남겼고, 뇌이 조약에서 다시 영토를 잃었다.
4. 1. 부쿠레슈티 조약 (1913년)
7월 30일부터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 왕국에,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동트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에 내주었다.[84]불가리아는 7월 19일 이미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할양하는 데 동의했다. 이로써 주요 목표를 달성한 루마니아는 부쿠레슈티에서의 강화 협상에서 중재 역할을 맡게 되었다.[84]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의 마케도니아 분할에서 바르다르 강을 국경으로 하고 싶어했지만, 세르비아는 스트루마 강을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압력으로, 세르비아는 북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얻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슈팁만은 (파시치의 말을 빌리면) "피체프 장군을 기념하여" 불가리아에 남았다. 이반 피체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직전까지 진격했던[84] 불가리아군 참모총장이었으며, 당시 불가리아 대표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불가리아가 카발라를 소유해야 할 이유에 대해 피체프가 설명했을 때, 베니젤로스는 "장군, 우리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6월 (29일) 이전, 우리는 당신을 두려워하여 세레스와 드라마와 카발라를 넘겨주었지만, 이제 우리는 승자의 역할이며,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84]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는 불가리아를 지지했지만, 그리스는 왕비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었던 점과 독일과의 동맹, 프랑스의 지원을 통해 카발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불가리아는 개발 수준이 낮은 데데아가치 항만만 확보할 수 있었다.[84]
협상은 8월 8일까지 종결되었다. 8월 10일,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가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여 마케도니아를 삼분했다. 그중 가장 큰 북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에, 가장 작은 피린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해안 지역의 에게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에 귀속되었다.[84] 이에 따라 제1차 발칸 전쟁 전과 비교하여 불가리아는 영토가 16%, 인구는 430만 명에서 470만 명으로 증가했다. 루마니아는 영토가 5% 증가했고, 몬테네그로는 영토가 62% 증가했다.[85] 그리스는 영토가 68% 증가하고 인구는 270만 명에서 44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르비아는 영토가 거의 두 배로 증가하여 인구는 290만 명에서 450만 명으로 증가했다.[86]
몬테네그로 대표는 부쿠레슈티에서의 협상에서 노비파자르에서 세르비아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고, 이는 성공하여 11월 7일에 베오그라드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확인되었다.[84]
4. 2. 콘스탄티노플 조약 (191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은 1913년 9월 30일 불가리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었던 동트라키아의 일부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41]8월,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에 평화 협상을 압박하기 위해 코모티니에 서트라키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불가리아는 9월 6일 미하일 사보프 장군과 외교관 안드레이 토셰프, 그리골 나초비치를 대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했다.[41] 오스만 대표단은 메흐메트 탈라트 베이 외무장관, 츠뤼크술루 마흐무드 파샤 해군장관, 할릴 베이로 구성되었다.[41]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는 에디르네가 다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하려 했으나, 불가리아 대표 토셰프는 오스만 측에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자국의 영토로 여기고 있으며, 에디르네를 오스만이 차지하면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차지하려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41]
불가리아는 에디르네를 포기하는 대신 크르크 킬리세(로젠그라드)를 확보하려 했으나, 오스만 측은 자신들이 차지한 영토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41]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에서 불가리아는 동트라키아의 주요 도시들을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불가리아군은 10월이 되어서야 로도피 산맥 남쪽으로 철수했다.[41]
이후 라도슬라보프 정부는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을 모색하며 협상을 계속했고, 이는 1914년 8월 비밀 불가리아-오스만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따라 오스만 트라키아의 46,764명의 정교회 불가리아인들은 불가리아 트라키아의 48,570명의 무슬림(터키인, 포막족, 로마인)과 교환되었다.[42] 교환 후, 1914년 오스만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에는 불가리아 총대주교청에 속한 불가리아인 14,908명이 남아 있었다.[43]
4. 3. 전쟁의 장기적 영향
제2차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는 도나우 강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로 성장하여[88] 바르다르 중부와 노비 파자르의 동쪽 절반을 얻었다. 이는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통해 이루어진 군사 투자 덕분이었다. 세르비아의 영토는 약 48303.04km2에서 약 87776.85km2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50만 명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영토의 주민들은 전후 탄압과 괴롭힘을 당했다. 예를 들어, "문화 수준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거부당했는데, 실제로는 세르비아인 이외의 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드니치케 노비네(Радничке новине) 등 야당 계열 신문은 "새로운 세르비아인들"이 터키 지배하에서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89]. 터키식 건물, 학교, 목욕탕, 모스크가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에는 영국 부영사가 체계적인 협박,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 등이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합병 지역에서 자행되었다고 보고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조사하거나 막는 데 관심이 없었고, 공정하게 선발된 여러 국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카네기 조사단이 발칸 반도에 도착했을 때 베오그라드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90].강화 조약에 따라 그리스군은 전쟁 중 점령했던 서트라키아와 피린 마케도니아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불가리아에 할양된 지역과 알바니아에 할양된 북에피로스는 그리스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스는 전쟁 중 점령했던 지역 중 독일의 외교적 지원으로 간신히 세레스와 카바라만을 확보했다. 세르비아는 북마케도니아에서 더 많은 영토를 얻고 남부에서의 영토 확장에 만족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눈을 돌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갈등을 빚었고, 1년 후 전쟁이 발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에서 리비아를 둘러싼 싸움 중 에게해의 도데카니사 제도를 점령했지만, 발칸 전쟁을 구실로 1912년 협정을 위반하여 반환하지 않았다.
런던 조약에 따라 알바니아는 독립했지만, 아드리아해의 오트란토 해협을 지배하려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가 강력하게 주장한 결과였다. 1913년 12월 17일 피렌체 협정에서 알바니아의 국경이 결정되면서 세르비아는 아드리아해로의 출구를 잃었고, 그리스는 알바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북에피로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지 그리스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결정이었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1914년 코르푸 협정에서 북에피로스 자치 공화국을 건국하여 자치권을 얻었다[91].
패배한 불가리아는 보복주의에 빠져 민족주의적 야망을 채울 기회를 엿봤다.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된 후, 불가리아 대표단 단장 톤체프는 "열강이 (영토 분할을) 바꾸거나, 우리 자신이 그것을 깨뜨릴 것"이라고 말했다[88]. 그 결과, 불가리아는 발칸 지역의 적국(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루마니아)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편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중앙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다시 패배하여 국가적 트라우마를 남겼고, 누이 조약에서 다시 영토를 잃었다.
5. 주요 전투 목록
전투명 | 불가리아군 | 상대국 | 날짜 | 결과 |
---|---|---|---|---|
브레갈니차 전투[29], 칼리만치 전투[31] | O | 세르비아 | 1913년 6월 17일 - 7월 18일 | 세르비아 승리, 불가리아 방어 성공 |
킬키스-라하나스 전투[25], 도이란 전투[2], 크레슈나 협곡 전투[32] | O | 그리스 | 1913년 6월 19일 - 7월 18일 | 그리스 승리, 협상 타결 |
남부 도브루자 공세 | O | 루마니아 | 1913년 7월 초 | 루마니아 승리, 남부 도브루자 할양 |
오스만 제국의 트라키아 진격 | O | 오스만 | 7월 중순 | 오스만 승리, 동트라키아 재점령 |
참조
[1]
웹사이트
Bulgarian troops loses during the Balkan Wars
http://www.bulgarian[...]
2012-01-12
[2]
harvnb
[3]
harvnb
[4]
학술지
A novel method to combat the cholera epidemic among the Romanian Army during the Balkan War – 1913
https://www.research[...]
[5]
웹사이트
Epidemiile în istorie O epidemie uitată. Holera, România și al Doilea Război Balcanic din 1913
https://unibuc.ro/ep[...]
University of Bucharest
2020-05-25
[6]
논문
Serviciul Sanitar al Armatei Române în perioada 1914–1919
http://www.cnaa.md/f[...]
Ion Creangă State Pedagogical University
[7]
웹사이트
Calculation
http://www.army.gr/f[...]
Hellenic Army General Staff
2010-01-14
[8]
harvnb
[9]
서적
Entangled Histories of the Balkans
Brill
[10]
뉴스
Correspondants de guerre
Le Petit Journal Illustré
1912-11-03
[11]
웹사이트
Balkan crises
http://cnparm.home.t[...]
Texas.net
[12]
harvnb
[13]
서적
Tsarigrade/Istanbul and the Spatial Construction of Bulgarian National Identity in the Nineteenth Century
http://www.ceeol.com[...]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Online Library
[14]
서적
The Rise of Nationality in the Balkans
BiblioBazaar
[15]
서적
A short history of modern Bulgaria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간행물
The war between Bulgaria and Turkey 1912–1913
Ministry of War
[21]
간행물
The war between Bulgaria and Balkan Countries
Ministry of War
[22]
간행물
The Greek Army during the Balkan Wars
Ministry of Army
[23]
harvnb
[24]
간행물
The Greek Army during the Balkan Wars
Ministry of Army
[25]
harvnb
[26]
웹아카이브
The villages around it are Bulgarian to the north and west, but a rural Greek population approaches it from the south and east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27]
서적
The Balkan Cockpit – The Political and Military Story of the Balkan Wars in Macedonia
https://books.google[...]
Read Books
[28]
서적
Targeting Civilians in War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9]
harvnb
[30]
harvnb
[31]
harvnb
[32]
harvnb
[33]
harvnb
[34]
서적
The Balkan cockpit
T. Werner Laurie LTD
[35]
harvnb
[36]
논문
Armenians and the Cleansing of Muslims 1878–1915: Influences from the Balkans
https://www.tandfonl[...]
2019-07-03
[37]
서적
Балканските войни на българската армия
Millennium
[38]
harvnb
[39]
웹사이트
Turkey in the First World War – Balkan Wars
http://www.turkeyswa[...]
Turkeyswar.com
2010-08-04
[40]
서적
The major international treaties of the twentieth century
Taylor & Francis
[41]
harvnb
[42]
논문
Balkan devletleriyle Türkiye arasındaki nüfus mübadeleleri (1912–1930)
https://acikbilim.yo[...]
2018-08-06
[43]
서적
Ottoman Population, 1830–1914, Demographic and Social Characteristics
https://kupdf.net/do[...]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44]
harvnb
[45]
웹사이트
ECommons@Cornell: Carnegie Report, the Serbian army during the Second Balkan War, 1913
http://ecommons.libr[...]
2015-04-09
[46]
서적
The Sleepwalkers
[47]
서적
Southern Albania or Northern Epirus in European International Affairs, 1912–1923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48]
논문
The Indian Red Crescent Mission to the Balkan Wars
https://www.tandfonl[...]
Taylor & Francis
2009-06-11
[49]
harvnb
[50]
서적
Defeat in Detail, The Ottoman Army in the Balkans, 1912–1913
Praeger
[5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bulgarian[...]
2012-01-12
[52]
harvnb
[53]
웹사이트
Calculation
http://www.army.gr/f[...]
Hellenic Army General Staff
2010-01-14
[54]
harvnb
[55]
harvnb
[56]
웹사이트
Balkan crises
http://cnparm.home.t[...]
Texas.net
[57]
harvnb
[58]
서적
Tsarigrade/Istanbul and the Spatial Construction of Bulgarian National Identity in the Nineteenth Century
http://www.ceeol.com[...]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Online Library
[59]
서적
The rise of nationality in Balkans
[60]
서적
A short history of modern Bulgar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61]
harvnb
[62]
harvnb
[63]
harvnb
[64]
harvnb
[65]
간행물
The war between Bulgaria and Turkey 1912–1913
Ministry of War
[66]
간행물
The war between Bulgaria and Balkan Countries
Ministry of War
[67]
간행물
The Greek Army during the Balkan Wars
Ministry of Army
[68]
harvnb
[69]
간행물
The Greek Army during the Balkan Wars
Ministry of Army
[70]
harvnb
[71]
서적
Report of the International Commission to Inquire into the Causes and Conduct of the Balkan War
https://www.archive.[...]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2017-10-10
[72]
서적
The Balkan cockpit
https://books.google[...]
T. Werner Laurie LTD
[73]
서적
Targeting Civilians in War
https://books.google[...]
2016-07-29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Balkan Wars, 1912–1913
https://books.google[...]
Hellenic Army General Staff
2016-05-13
[80]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Balkan Wars, 1912–1913
https://books.google[...]
Hellenic Army General Staff
2016-06-03
[81]
서적
The Balkan cockpit
T. Werner Laurie LTD
[8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Balkan Wars, 1912–1913
https://books.google[...]
Hellenic Army General Staff
2016-04-26
[83]
서적
[84]
서적
[85]
웹사이트
Turkey in the First World War – Balkan Wars
http://www.turkeyswa[...]
Turkeyswar.com
2010-08-04
[86]
서적
The major international treaties of the twentieth century
Taylor & Francis
[87]
서적
[88]
서적
[89]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ecommons.libr[...]
2015-04-09
[90]
서적
The Sleepwalkers
[91]
서적
Southern Albania or Northern Epirus in European International Affairs, 1912–1923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92]
서적
The Balkan Wars, 1912–1913: Prelude to the First World War
Routledg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